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트남 공화국 군력 (문단 편집) === 자구책의 부재 === [[https://m.blog.naver.com/kkumi17cs1013/221311931022|#]][[https://m.blog.naver.com/kkumi17cs1013/221311865434|##]][[https://panzerbear.blogspot.com/2006/12/1974.html|###]][[https://m.cafe.daum.net/shogun/Mq7W/383?listURI=%2Fshogun%2FMq7W|####]] 남베트남군은 미군의 압도적인 지원과 미국으로부터 받은 우수한 군사장비와 물자들을 조합한 막강한 화력으로 북베트남군을 밀어내는 데 익숙했다. 그렇지만 1973년, 파리 평화 협상 타결로 미군이 철군하기로 결정하면서 남베트남군에게도 문제가 생긴다. 미국이 단순히 군대 철수만 한 것이 아니라 남베트남에게 지원하는 군사 원조도 크게 삭감해버린 것이다. 남베트남군의 탄약 및 유류 소모율은 미군의 지원이 있었던 시절에도 심각하게 높았는데 미국이 지원을 크게 줄여버리자 남베트남군의 군대는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강한 화력을 무지막지하게 쏟아붓는 "부자들의 전투방식"에 익숙해진 남베트남군은 기존 전투방식을 바꿀 수가 없었고 결국 1974년에 남베트남군은 송두리째 붕괴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중부 고원 남베트남군 포병 포대들은 미군 주둔 시에는 하루 평균 100발의 포탄을 소모했지만 1974년에는 하루 평균 '''4발로 줄어들었다.''' 보병들도 '''한 달에''' 불과 85발의 소총탄을 지급받는 상황에 처했으며 수류탄과 기타 탄약 그리고 무전기의 배터리도 고갈되어 제대로된 작전이 불가능해졌다. 남베트남군 트럭의 50%는 연료 부족으로 보관 상태에 있었으며 다른 차량과 장비도 절반밖에 운용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물론 가동 가능한 차량들도 연료를 최대한 아껴야 하기에 필요한 상황에서만 장비를 가동해야 하므로 당연히 작전 범위도 제한되었다. 남베트남 해군도 [[메콩강]]에 주둔한 부대 절반을 해체했으며 남베트남 공군은 헬리콥터와 수송기 가동률이 '''최대 70%까지 감소하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미군들은 철수하면서 자기들이 운용하던 무수히 많은 항공기들을 남베트남에게 공여하는 형태로 처분하고 갔는데 이 덕분에 남베트남 공군은 수치상으로는 '''세계 4위의 공군'''이 되었지만 정작 남베트남 공군 입장에선 이들을 유지할 여력이 전혀 없었던 상황이었다. 1974년, 남베트남군의 소티는 '''30~60소티 밖에 되지 않았다.''' 당연히 이러다보니까 신규 장비 도입들도 전부 취소되었다. 남베트남 민병대는 PRC-10 구형 무전기를 대체하지 못하고 그대로 사용했어야 했으며 이미 구매 발주한 [[F-5]] 전투기 36대 사업도 취소되었다.[* 오일쇼크 때문에 남베트남 물가도 폭등하던 상황이라 무기 체계는 커녕 군사물자 도입도 꿈도 못꾸고 있었다.] 남베트남군 전체적으로도 1975년 7월이면 '''휘발유는 7일 치, 경유는 4일 치만 남게 된다는''' 절망적인 예상 데이터도 있었다. 물론 그러기도전에 남베트남은 패망해버렸다. 당시 남베트남은 나름대로 자구책을 마련해보려고 했다. 그렇지만 1973년에 북베트남이 공작원들을 보내 사이공 인근 남베트남의 [[https://www.nytimes.com/1973/12/03/archives/vietnam-reds-set-fuel-depot-afire-rockets-hit-nations-biggest.html|원유저장고를 폭파하는데 성공하면서]] 그 남은 비축유마저 송두리째 날라가버리면서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파라셀 군도]]에서 석유 발견으로 잠시 들뜨긴 했지만 1974년에 [[중국 해군]]이 남베트남 해군을 격파하고 파라셀 군도를 점령해버리면서 남베트남의 기대는 수포로 돌아간다. 남베트남은 미국 해군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미국 해군은 당연히 들어주지 않았다. 남베트남은 외교 채널을 모두 동원해서 미국에게 필사적으로 군사 원조를 요청했지만 미국 의회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이렇다할 자구책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남베트남은 그렇게 패망하게 되었다. 남베트남은 일말의 희망으로 북베트남군의 전면 재남침 시 미군이 다시 지원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지만 헛된 기대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군의 현대화가 1970년대 중반부터 가속이 붙은 이유 중 하나가 경제적 여유도 있지만 남베트남 패망을 보고 한국의 가치는 미국이 정하는 것이며, 상황에 따라서는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45년 후 충분한 국방력을 갖추지도 못한 상황임에도 그저 러시아와 서방만 바라보면서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등에 자신들의 이해관계만을 강요하며 도발외교를 일삼던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과 전쟁을 했다가 멸망은 면했으나 또 다시 영혼까지 털리면서 그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이 입증되었다.] 당시 [[제럴드 R. 포드]] 대통령은 닉슨이 미처 처리하지 못한 과제들을 해결하는데 급급했고 [[미국 의회]]는 베트남 재개입을 결사반대하고 있었다. 미국은 이렇게 남베트남을 직접적으로 지원할 수 없게 되자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살#s-2]] 왕에게 대리 원조를 부탁했고 곧 파이살 왕은 남베트남에 대한 대규모 원조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그렇지만 1975년 3월 25일에 그가 조카에게 암살당하고 말면서 이 마저도 수포로 돌아간다.[* 만약 파이살 왕이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이미 북베트남군의 공세로 남베트남군 전선 붕괴가 한참 진행되던 시점이라 무용지물이었을 것이다.] 사이공 함락 직전 대규모 미 해군 함대들이 남중국해에 집결했지만 이는 북베트남군을 폭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베트남에 체류중인 자국 국민들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